박남훈편
동해바다란 시집을 발간한 박남훈 시인의 원래 고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문인은 별로 없다.
혹자들은 과연 고향이 이 땅에 두고 있기보다 어쩌면 이웃나라 일본의 교포쯤으로 혼돈을 하기가 다반사다. 누구나 정말 알고 보면 동해안의 아주 조그만 포구에 속하는 대게의 원산지인 강구가 박남훈 시인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처음으로 고고의 성을 울린 고향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보다도 생전에 고향을 사랑하면서도 어쩌면 고향이 없는 실향민처럼 타관 객지로 부평초마냥 하염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박남훈 시인은 우리네 속담에 상시로 회자되고 있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나 아니면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가고 말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설이 전해 내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함으로서 타향살이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어느 누가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립지 않으랴만 유독 박남훈 시인의 뇌리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동해바다야 말로 파란 만장한 생애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노스텔지어의 깃발을 상징해 주기도 한다.
어느 소설가는 서울은 만원이라고 했지만 정말 우연히 인간 산해인 한종로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신명이 나서 고향 타령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우선 첫 인상에 대한 선입견이 생면부지한 사이라도 서로 통성명을 하면 대번에 낯설지 않고 낯익은 인상이 풍긴다.
언젠가 내가 우연히 대구에서 이한호 시인이 경영하는 뉴빌라 라는 레스토랑에서 이한호 시인의 인사 소개로 생전 처음으로 상면하게 된 동향(同鄕)의 선배인 박남훈 시인은 일개 무명의 고향 후배인 필자를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대뜸 첫 마디로 하는 말이 “김재진 시인 평론을 한 번 해보시오”
그 순간 나는 솔직히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왜 하필이면 그 어려운 평론을 권고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얼마 후에 오랜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수수께께 같은 의문을 풀게 된바 그는 이미 어느정도 어줍잖은 재능을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평필을 들게 된 계기야 말로 다름 아닌 당시 경북지역의 공무원 문학동인의 창립자인 이재행 시인의 청탁에 의한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필경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언감생심 필자는 여전히 후회없이 박남훈 선배의 예언이 적중한 은공과 또한 이재행 시인의 헌신적인 성원과 격로에 힘입은 혜택으로 종내 필자에도 없는 평론가로 어줍잖게 행세하면서 결코 평탄하지만 않은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대게의 고장인 동해안 강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박남훈 시인은 청남빛 고향 바다의 구성진 갈매기 울음소리와 코끝으로 풍기는 비린내의 향수를 무척이나 동경했다. 여기에 금상첨화로 황금빛 찬란한 아침해가 수평선 위로 두둥실 떠오르면 만경창파의 푸른바다를 향해 우렁찬 통통배 고동소리 아득히 살아져 갔다.
요지경같은 세상탓인지 모르지만 약관에 이르러 갑자기 역마살이 낀 풍각쟁이로 둔갑하므로서 종내 동경하던 고향바다를 미련없이 등지고 상경한 채 이 밤의 나그네가 되었다.
진실로 문학에 대한 야망은 대단하였지만 입신출세를 도외시하므로서 후학양성만을 지향한 문학지 발간의 출판업 종사에만 일관하였다. 이런 그의 고집스런 뚝심은 흔들림 없이 하루밤 사이에 부익부와 빈익빈이 엇갈리는 혼미한 세태의 변화 속에서도 청빈도락의 선비정신을 고수하였다.
그가 편집 주간으로 몸담고 있는 문학지의 관문을 통해 배출된 작가의 수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활약중이며 대부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생애토록 고진감래 하면서도 한눈팔지 않고 비영리 사업중에도 가장 빈부의 격차가 심각한 문학지 출간에 일로 매진하였음을 미루어 볼 때 얼마나 문학에 의한 애착이 지대했음을 한 눈에 읽게 된다.
오늘도 인육시장에서 우리네 적자생존을 저울질하며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감을 절감하면서 웅변보다 침묵으로 경천애인 사상을 실천 중행하는 박남훈 시인같은 작가는 매우 드물 것이다.
물레방아마냥 돌아가는 유구한 세월은 그냥 하염없이 흘러가도 황금의 노예로 전락한 탕아들이 마구 호의호식하면서 백일몽을 꿈꾸며 저마다 혼미한 세상의 몽상에서 깨어나 바라보는 바람벽을 등지고 넝마에 남루 한 짐진 그가 모진가난에 찌들린 생활고를 애써 극복하며 인생은 공수거공수래 라는 고단한 미로를 홀로 가고 했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듯이 적자생존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인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삶의 현장에서 고진감래 하면서도 마다않고 죄다 수용하며 박남훈 시인이 문학을 생업으로 삼게 됨은 경탄할 일이라 하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오로지 작가란 지성을 겸비한 사회의 공인으로 극진히 대우를 받아야 하며 이것과 무관하게 별개로 지연과 학연을 통한 인맥을 동원하여 하루아침에 명예를 얻기 위해 본분을 망각한 채 경거망동을 자행함은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성이 실종된 시대의 이 풍진 세상에서 부귀영화에 한눈팔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평생토록 풍각쟁이처럼 홀로 방랑하며 살다가 단 한권의 시집 동해바다만을 남겨놓고 고희를 바라보면서 급기야 타계한 박남훈 시인이야 말로 파란 만장한 생애를 형산강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도음산 자락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