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탁심 광장 주변에는 오스만 제국과 현대 튀르키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물과 상업 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광장에서 시작하여 갈라타탑까지 이어지는 이스티클랄 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자유롭고 예술적인 풍경을 펼쳐 보인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인파는 시대처럼 도도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튀르키예 국부 아타튀르크의 유산인 세속주의를 벗어나고자 2021년에 완공한 탁심 모스크는 대형 돔과 미나레트(첨탑)를 앞세워 고요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양한 백화점, 쇼핑몰,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 고급호텔들이 즐비한 탁심 광장 주변 풍경은 혼돈과 무질서가 빚은 풍요로운 상업적 활기라 할 만하다.
광장 중앙에는 터키 공화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공화국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동지들이 군복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주변에는 터키의 국기 알 바이라크(Al Bayrak, 붉은 깃발)가 휘날리고 있다.
광장 한쪽에 자리한 게지 공원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어 잠시나마 녹음과 휴식을 제공한다. 상업 지역과는 대조되는 평온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 평온한 공간이 뜨거운 갈등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었다. 2013년 당시 튀르키예 정부가 게지 공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오스만 시대 병영을 재건하는 등 대규모 재개발을 추진했다. 공공녹지를 없애고 상업화하려는 이 계획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탁심 광장은 터키 시민들의 정치적·사회적 불만이 모이는 집회와 시위의 장소가 되었다.
시위 첫날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소수의 환경운동가와 시민들이 모여 게지 공원에 텐트를 치고 오스만 병영 재건에 반대하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서명대를 설치하고 친환경 피켓을 들었다. 가족 단위 방문객들과 젊은 대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공원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대화했다. 이 평화는 경찰의 최루탄과 물대포에 날아갔다.
경찰의 강경 진압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공원 안으로 밀려들어가며 혼란에 휩싸였다. 최루탄 연기가 공원을 뒤덮었다. 매운 연기 속에서 시민들은 서로를 부축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탁심 광장과 게지 공원에 모였다. 시위는 공원 보존 운동을 넘어 표현의 자유, 경찰 폭력 반대, 권위주의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환경운동가, 대학생, 직장인, 예술가, 노년층까지 다양한 배경의 시민들이 함께했다. 시민들은 피켓을 들고 목청 높이 공원 보존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외쳤다.
광장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시작되고 목소리가 모이는 상징적 공간이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나라에서 광장은 민주적 변화를 촉발하는 공론장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선동과 폭력의 무대로 변질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광장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모두에서 중요한 장소로 여겨지지만 그 결은 크게 다르다. 민주주의는 광장을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소통하고 문제를 논의하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는 광장을 집단 결속과 이념 선전의 도구로 삼아 체제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체제에 따라 광장의 속성이 달라진다고는 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의 광장에서도 얼마든지 사회주의적 광장의 속성을 보일 수 있고,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민주주의적 광장의 속성을 보일 수 있다. 단지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성격과 그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광장은 자유와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하고 억압과 선동의 공간이 되기도 할 뿐이다. 광장은 비어 있는 공간처럼 그 성질 또한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공(空)한 존재다.
이렇게 광장의 메타포는 극단적이며 이중적이다. 광장은 민주적이면서 반민주적이다. 광장은 자유로우면서도 파쇼적이다. 광장은 열려있는 폐쇄공간이다. 그래서 문학적 상상력의 층위를 담아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의 봄과 벨벳 혁명을 통해 시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 곳으로, 평화적 변화를 이끌어낸 광장의 순기능을 보여주는 사례다. 반면 1930년대 독일의 뉘렌베르크 광장은 광장의 역기능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를 일깨워준다. 나치는 대규모 집회를 열어 군중을 선동하고 철저히 통제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이곳에서의 집회는 토론과 의견 교환이 아니라 일사불란한 복종과 이념의 주입으로 일관했다. 비판적 사고와 자율성이 배제된 광장에는 폭력과 선동의 구호만이 울려 퍼졌고 대중은 체제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받았다. 이 사례는 광장이 억압의 도구로 변질될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광장의 메타포가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곳은 프랑스 콩코르드 광장이다. 그곳은 왕정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곳으로 왕정 몰락과 시민 권리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광기에 사로잡힌 혁명 지도부는 자유와 평등의 광장을 억압과 선동의 광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이 민주적 변화를 이끄는 공론장이 될지 선동의 장이 될지는 그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광장이 단순히 도시의 한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변혁을 담아내며 권력과 민중이 마주하는 장소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건강성을 드러내는 메타프로 작용함을 보여 주었다.
탁심 광장 또한 광장의 이중적 속성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게지 공원 시위에는 환경 운동가, 젊은이, 직장인, 상인, 정치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며 다양한 목소리가 모였다. 환경 운동가들은 공원 보존을, 젊은이들은 표현의 자유와 경찰 폭력 문제를, 직장인과 상인들은 재개발의 경제적 영향을 우려했다. 진보 성향의 정치인들은 튀르키예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시위 초기에는 환경 보호가 중심 이슈였으나, 점차 표현의 자유, 경찰 폭력, 권위주의 청산 등 더 넓은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었다. 탁심 광장은 이러한 목소리들이 공론장으로 모이는 동시에 갈등의 온상으로 변할 가능성도 함께 지닌 공간이었다.
시민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수렴하며 성숙한 방식으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시위대 내부의 다양한 갈등들도 비교적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일부 급진적 요구가 제기될 때마다 평화를 고수하자는 목소리가 지지를 얻었다. 탁심 광장은 특정 지역 개발 문제를 넘어 튀르키예 사회의 건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랑받는 공간인 광장은 가치중립적이다. 광장은 민주주의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사회주의를 혐오하지도 않는다. 또한 사회주의를 사랑하지도 민주주의를 혐오하지도 않는다. 다만 광장은 때로는 광장이 가진 순기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광장이 가진 잔인한 역기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둘의 차이는 단 하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성이 작동하느냐 마비되느냐의 차이다. 이것은 고대 아고라에서 비롯되었던 광장에 대한 가치와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인파 속에서 탁심 광장을 서성이며 이 광장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계층의 요구와 주장을 열린 태도로 수렴하고 끝까지 민주적인 방법으로 게지 공원을 지켜낸 탁심 광장. 동서양의 수많은 문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독특한 정체성을 쌓아온 이스탄불. 두 공간은 서로를 닮아 있다. 이들은 질서와 무질서가 뒤섞이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이스탄불과 탁심 광장이 함께 추는 할라이 춤의 리듬을 느끼며 이스티클랄 거리의 인파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