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한동대학교 지역혁신원 자문위원

무신론과 유신론을 대표하는 양대 석학들 대화는 풀리지 않던 의문들에 모범 답안을 제시해 준다. 구약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는 모태신자에게도 영원한 숙제다. 루이스가 극찬한 복음서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있다.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다시피 한 성경 읽기지만 여전히 어렵다. 신의 뜻을 살펴 알아듣는 일이 보통 사람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알아는 듣더라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후려치거든 왼뺨을 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 이 게 과연 보통의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인가. 못 알아듣는 척 할 수밖에 없다.
루이스 권유대로 복음서를 읽다가 눈 길이 멈춘 곳이 있다.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예수의 세 가지 시험 대목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건드리는 시험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알고 믿어오는 중이다. 그런데 문득 다시 눈 길이 가게 되는 이유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인간의 식욕과 권력욕을 건드린 것으로 해석이 되는데 세 번째 질문이 어떤 욕망인지 언뜻 파악이 안된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악마에게 절을 하라. 두 가지는 그렇다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무엇을 시험하려는 것인가. 이 것은 무슨 욕망을 자극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고소 공포증도 있는데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까. 대기권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 점프 마니아들이 있긴 하지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굳이 인간의 욕망으로 연결시키자면 영웅심리나 방종에 대한 욕구일 수는 있겠다. 네 맘대로 해 봐라 모든 것은 신이 해결해 줄 테니. 네 멋대로 살아보라.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괜찮다. 케세라 세라. 시간을 네 멋대로 사용하고 사람 사이에 관계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멋대로 살아라. 그래도 구원을 해 줄 테니’ 하는 것인가.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보라.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다 잘 된다 하는 유혹인가. 당뇨병이든 다이어트 중이든 눈 앞의 샤인 머스켓 한 송이를 다 뜯어 먹어라. 아무 일도 안 일어날 테니. 그런 건가.
코로나 이후 일상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상의 의미, 일상의 중요성, 일상의 소중함 등. 일상이란 일탈이 자행될 때 의의를 갖는다. 일탈할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없는 일상이란 감옥일 것이다. 일탈의 전제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원력’(resilience)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얼마 전 제주도 앞바다에서 어선이 침몰했다. 고등어 그물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있었는데 이를 무리하게 끌어 올리다 배가 뒤집힌 것이다. 선박의 필수 기능인 ‘복원력’을 상실한 것이다. 일탈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복원력’을 유지해야 한다. 너무 멀리 나가지 않고 선을 넘지 않는 일이다.
가을에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는다. 인체의 자동 복원력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코로나를 제대로 앓은 이후 신체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평소 바이러스를 과도하게 두려워했는데 코로나로 더욱 예민해진 것은 한편 다행스럽다. 인류세 차원의 질병을 견뎌내는 동안 인간은 강해졌을지 약해졌을지 사람들을 관찰해 본다. 인공지능과 로봇과 함께 살아가기에 필요한 건강(혹은 복원력)을 인류가 배양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첫눈이 폭설로 쏟아진 게 몇 십 년만이라 한다. ‘눈 덮인 벌판을 걸어갈 때 비틀거리지 마라. 뒤 따라오는 사람이 잘못 가지 않도록 발자국을 잘 남기라’. 조선시대 어느 지식인의 말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한 해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비틀거리며 걸어 왔을지 돌아본다. 살아있는 우리는 나무나 바위처럼 고착되어 있을 수 없다. 실수도 잘못도 이에 따른 슬픔이나 허탈함도 생명 유지에 따르는 비용이다. 다만, 궤도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고 휘청 벗어날 때마다 복원하려는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려는 노력이 한 해를 보내는 우리를 위로한다.
안톤 체호프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일탈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능성을 내비쳤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저지르는 일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질구질한 금기를 훌훌 털어내고 우리 삶의 범주를 확 넓혀주는 표현이다. 한강 작가 말대로 ‘설령 자신에게 고통이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삶이란 얼마나 괜찮은 인생인가. 기대감과 함께 또 한 해를 맞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