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석 이종학 박사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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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은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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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무대왕 수중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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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무대왕 어진. 통일전 소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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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무대왕 유조비. 경부박물관 소장 | ||
일찍이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1940년 8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길러 보아라. 태종 무열왕의 위업(偉業)과 김유신의 훈공(勳功)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가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蹟)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아라…"
그가 말한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란 무엇이며, 그의 유적은 어떤 것이 남아 있을까? 만약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유적에 대해 바른 해석을 하기가 어려우리라. 예컨대,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창건하기 시작했는가?
한일고대사 특히 신라와 왜는 해상세력에 있어서 어느 편이 우세했는가? 통일신라의 안전 번영과 찬란한 문화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 엇갈리는 감은사의 창건 유래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감은사지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감은사는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난 후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좇아 즉위한 지 2년 되던 해인 682년에 완성한 신라시대의 사찰이었다.
감은사지에서 바닷가로 조금 나가면 두 갈래의 길이 있고, 여기서 오른편으로 가면 양북면 봉길리라는 해안 마을이 나온다. 봉길리 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바닷속에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다.
왼편 길로 가면 길가에 1989년 10월에 건립한 ‘동해구’라는 비석이 서 있고, 거기서 조금만 가면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1970년에 새로 누각을 지었는데, 그것이 이견정(利見亭)이다. ‘동해구’라는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곳 바다와 땅은 신라 으뜸의 성역인 동해구이다. 통일의 영주(英主) 문무대왕이 왜병을 진압코자 창건한 감은사와 승하 후 호국룡이 되기를 유언하여 뼈를 묻은 해중릉 대왕암과 아들 신문왕이 사모하여 해안에 쌓은 이견대 등 세 유적이 전하고 있다.…
오늘날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창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감은사의 창건 유래를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이다. 개료 원년 신사(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사중기(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고,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료 2년(682)에 마쳤다.…)(권 2, 만파식적)
감은사의 창건 유래에 관해 본문과 그 주(註)인 '사중기'의 기록이 엇갈리고 있는데, 일연은 서로 다른 사료가 있어 분명하게 진위를 식별할 수 없는 경우, 두 사료를 그대로 수록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렇다면 감은사는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것인가, 아니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신문왕이 완성한 것인가.
만약 우리들이 전자를 택하는 경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으리라. 즉, 문무왕은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따라서 그의 왕릉을 신라에서 가장 거대한 것으로 축조한다 해도 온 국민들은 즐겁게 그 요역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유언을 통해, 분묘는 재물만 허비하고 또 헛되이 인력만 낭비하는 것이니 임종 후 화장해서 동해구의 큰 바위에 장사하라고 했다. 그리고 문무왕은 평소에 늘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佛法)을 높이 받들어 나라를 수호하리라”고 했다.
따라서 신문왕은 살아서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또 죽어서도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숭고하고도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에 가까운 곳에 감은사를 세웠다.
◇ 당시의 왜의 실체
그러나 후자인 사중기의 내용대로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코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사료로서 채택하고자 한다면, 먼저 당시 신라와 왜 사이의 군사 정세의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왜군은 신라를
침공할 준비 태세와 능력(침공 가능성)을 갖추고 있었던가? 양국의 긴장도는 어느 정도인가? 문무왕은 왜병의 효과적인 진압 수단이 절을 창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왜의 신라에 대한 침공 위협 가능성에 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① 이 해(657) 신라에 사신을 보내, “사문 지달(沙門智達) 등을 그대 나라의 사신에 딸려서 대당(大唐)에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신라는 듣지 않았다.…
이 달(658년 7월)에 사문 지통(沙門智通)과 지달이 칙(勅)을 받들고 신라의 배를 타고 대당에 가서 무성중생의(無性衆生義)를 현장법사가 있는 곳에서 배웠다.(일본서기 권 26, 사이메이(齊明) 천황 3, 4년)
② 663년, 백강구(白江口)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갰다.(삼국사기 권 28, 의자왕 19년 및 일본서기 권 27, 덴지(天智) 천황 2년 참조)
③ 665년 8월, 달솔 답발춘초를 보내 나가토국(長門國)에 성을 쌓게 하였다. 달솔 억례복류(憶禮福留) 등을 츠쿠시국(筑紫國)에 보내 오노(大野) 및 기(椽)의 두 성을 쌓게 하였다.…667년 3월, 도읍을 킨고(近江)로 옮겼다.(일본서기 권 27, 덴지(天智) 천황 4, 6년)
④ 676년, 사찬 시득은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워 패전했으나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머리 4천여 급을 베었다.(삼국사기 권 7, 문무왕 16년)
⑤ 839년, 다자이후(大宰府)에 명하여 신라선(新羅船)을 만들게 했더니 풍파에 잘 견디었다.(속일본서기 권 8, 진메이(仁明) 천황, 승화 6년)
⑥ 839년 3월 17일, 사절단 일행은 각각 9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각각의 선장이 지휘했다. 선장은 일본인 선원을 통솔하는 외에 신라인으로 바닷길을 잘 아는 자를 60여 명 고용하여 각 배에 7명, 6명 혹은 5명씩 배치했다. 또 신라인 통역 김정남에게… (엔닌(圓仁), 입당구법순례행기 권 1, 3월 17일)
◇ 일본에 앞섰던 신라의 항해술
무열왕 4년(657)에 왜는 신라 사신에 딸려서 그들의 승려를 당나라에 보내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가, 다음 해에 당나라에 갔다는 것인데(①), 당시 왜는 서해를 횡단하여 당나라에 갈 배와 항해술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문무왕 3년(663) 왜는 백제를 돕고자 병선兵船 400척, 병력 27,000여 명을 파견했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강구해전에서 궤멸당하고 말았다(②).
그 후 왜는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백제의 병법가인 달솔 답발춘초 등에 명하여 침공 접근로인 지금의 기타큐슈(北九州) 지방과 야마구치(山口)현에 성을 쌓게 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내륙지방으로 옮겼다(③). 당시 왜는 완전히 수세적 입장에 몰려 있었다.
문무왕 16년(676) 신라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수군을 격멸함으로써 서해뿐만 아니라 주변 해역의 제해권마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④). 그리고 신라는 이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으로 하여금 신라에 대한 재침공의 의욕과 능력을 상실케 만들었다.
신라가 주변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160여 년이 경과 했어도 신라의 조선술은 일본보다 훨씬 우수했고 또 그들을 가르쳤다(⑤). 그리고 심지어 일본에서 파견하는 사신의 배에 신라인 항해사와 통역자가 동승해야 하는 실정이었다(⑥).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 794~864)은 이런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그는 입당할 때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도 겨우 난파당하면서 당에 도착했으며, 10년 후인 847년에 귀국할 때는 아예 신라선을 타고 순조롭게 돌아왔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조선술과 항해술로 보아,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직접 수용했다는 주장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838~847 사이의 일기)의 선구적 연구가였던 미국의 라이샤워(주일 미국대사 역임) 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은 활발한 해상무역을 수행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일본인들의 관심이 적다는 것과 특히 항해술에 있어서 신라인들이 일본인보다 훨씬 우수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일본인은 결코 용기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들이 험한 파도를 넘어 타는 선원으로서의 기술이 무사로서의 대담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는 수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가 되어 일본인들은 항해술과 검술에 의하여 ‘서해의 적’(왜구, 倭寇)이라는 달갑지 않은 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는 박혁거세 8년(기원전 50)부터 소지왕 22년(500)까지 30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고 또 여섯 차례나 금성에 대한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이 왜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고대한일관계사에서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의 고대사학자들은 그 ‘왜’를 야마토(大和) 정권으로 생각하고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한반도 진출과 지배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우리 측에서는 삼한의 일본열도에의 진출과 분국의 설치, 혹은 우리 민족에 속하는 ‘한인왜(韓人倭)’로서 남해안 일대부터 규슈(九州)의 북부까지 분포된 부족을 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신라사와 바다를 끼고 있는 한일고대사, 특히 신라와 왜의 관계는 이제 조선술, 항해술 그리고 해상세력 이론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 제해권의 확보와 문무왕
650년 진덕왕은 ‘태평송’을 지어 법민(法敏, 후에 문무왕)을 보내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으며, 당 고종은 그에게 대부경(大府卿)이란 벼슬을 주어 보냈다. 법민은 외교에서도 성과가 있었지만,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과 식견을 넓히고 또 당의 정치, 제도, 문물 등을 수용하여 신라문화의 개발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당의 장안(長安, 현재 시안(西安))까지 왕래하면서 수륙 교통수단의 장단점도 비교해 보았으리라.
660년 법민은 병부령(국방부 장관)으로서 병선 100척을 지휘, 덕물도에 나가 당의 소정방을 맞이했고, 또 백제정벌을 위한 전략계획도 수립했으며, 지상군 지휘관으로 이례성과 사비성 남령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수군을 지휘하면서, 만약 백제와 고구려의 수군이 강력하다면 당과 신라의 수군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642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대당외교의 창구인 당항성을 공격한 바 있었고, 또 김춘추는 648년 당에서 귀국하는 길에 고구려의 순찰선과 조우하여 간신히 죽음을 면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바다의 항로를 자유로이 활용하기 위해, 그리고 적의 선박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자군의 수군이 우세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해권의 확보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해상우세(sea superiority)의 기본 개념이다.
661년, 법민은 왕으로 즉위한 다음 신라군의 총사령관으로 백제, 고구려의 정복 및 당군의 한반도에서의 축출을 위해 진두지휘를 했다. 한편 그는 금성의 방위를 위해 663년 남산성과 부산성, 673년 서형산성을 증축하였고 또 북형산성을 신축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왜군의 가장 쉬운 접근로인 동쪽의 명활산성과 감은사 뒤편 성고개의 산성 및 감포성은 증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라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왜병의 침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데서 취한 조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공 때처럼 수도가 강화도로 천도하고 갖가지 수단을 강구 해도 효과가 없자 부처의 힘을 비는 극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문무왕 때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문무왕은 왜병을 진압하는 데 절을 짓는 전략 전술가가 아니었고, 또 왜병이 침공할 가능성도 전연 없는 시기였다. 따라서 감은사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절이다.
◇ 주목해야 할 ‘선부(船府)’ 설치
제해권은 국가의 흥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알려져 왔지만, 이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성공한 미국의 마한(Alfred T. Mahan, 1840~1914)은 그의 명저 '해상세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1890)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사가는 대체로 바다의 사정에 어둡다. 그들은 바다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상력이 여러 큰 문제에 대해 깊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간과해 왔다.…여기서 말하는 넓은 뜻의 해상세력(sea power)이란 군사력에 의한 바다 내지 그 일부분을 지배하는 해상의 군대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통상 및 해운을 포함하고 있다.…해상무역이 국가의 부와 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국가의 성장과 번영을 지배하는 참다운 원칙이 발견되는 훨씬 이전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무왕은 676년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했고, 그 이듬해인 678년 정월에 선부령 1명을 두어 선박의 사무를 관장케 했다. 원래는 진평왕 5년(583) 병부(兵部, 국방부)에 선부서가 있어 선박 사무를 관장해 왔는데, 이제 병부와 동격인 ‘선부’를 따로 설치하고 영(令, 장관)을 두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관해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적절한 해석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간과해 왔다.
‘선부’가 병부와 동격이요, 또한 ‘선부령’을 두어 선부의 사무를 관장케 한 것으로 보아, 병선뿐만 아니라 무역선, 어선까지도 관장했고, 수병과 선원들의 양성, 그리고 조선술, 항해술 등의 직무도 관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제도가 당이나 일본에도 있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 지상군에 의해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대륙 국가인 당에서는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도 없었다. 그러나 해양 국가인 일본에는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721년경에 제정된 양로율령(養老律令)에 의하면 병부성 관할하에 ‘주선사(主船司)’가 설치되어 있었으니, 신라의 ‘선부’는 당시 독특하고 독창적인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 해양정책에 주력한 문무왕의 탁견(卓見)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또 머리가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했다. 그가 신라의 외교사절로 당에 가서 식견을 높인 것 가운데 하나는 신라의 발전 번영을 위해 당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외교관계만은 결코 단절하지 않았다. 그는 당의 문물제도를 수용하고 무역을 함에 있어서 해상교통수단의 이로움을 알았고, 또한 해로의 위험과 어려움을 통해 불굴의 투지도 가꾸게 되었으리라.
문무왕은 주변의 제해권도 장악했고 통일전쟁도 완수했으니, 이제 장래 신라의 국가 목적과 국가정책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통일신라는 반도국의 특성인 수륙 양서국(水陸兩棲國)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대륙정책과 해양정책 어느 것이나 택할 수 있었다. 만약 대륙정책을 취한다면 말갈, 여진족과 전쟁을 계속해야 하리라.
문무왕은 유조(遺詔, 유언)에서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륙정책을 취하지 않기로 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해양정책에 있어서는 이미 신라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국제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문화의 수용과 교류 및 해외 진출 등으로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문무왕이 678년 정월에 병부에서 독립시켜 ‘선부’를 창설했다는 것은 신라가 해양정책을 택했음을 뜻하고,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주해종(陸主海從)’에서 ‘해주육종(海主陸從)’의 전략사상으로 전환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통일 후의 신라인들은 서해의 해상 교통로를 통하여 구도승, 유학생, 숙위, 군인, 상인 등 넓은 분야에 걸쳐 중국대륙에서 활동했고, 또 이들이 당의 문물제도를 수용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신라의 전성시대와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게 하는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 동해바다의 중요성 환기시킨 해중릉
전쟁의 종식에 따라 젊은이들의 산업 역군으로의 인력 활용, 각지 교통의 원활,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가공품이 수출무역의 주류로 점점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 때는 서라벌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거리에 끊이지 않았다. 왜인들의 눈에는 신라가 “금은의 나라…재보(財寶)의 나라”(일본서기 권 9)로 보였다.
또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중세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끄다시는 966년에 저술한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요로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신라 말기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과 신라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산동반도 등지에는 신라방이라는 거주지마저 생겼다. 이는 바로 문무왕이 ‘선부’를 설치하고 해양정책을 구체화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이 점에 대해 지금까지 사학자들은 간과해 왔던 것이다.
알프레드 마한의 해상세력 이론에 의하면, 우세한 해군력을 통한 제해권의 획득과 해상무역, 식민지 및 시장의 확보는 국가의 안전과 부강 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문무왕은 기벌포 해전의 승리로 서해와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획득했고, ‘선부’의 설치로 해양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대룡이 되겠다고 한 것은 해상세력의 확보를 통해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누리게 하겠다는 뜻이며, 대왕암에 장사케 한 것은 재정과 인력의 낭비를 방지하고 나아가 위정자와 국민들로 하여금 바다의 활용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통일신라는 안전과 번영을 누리며 찬란한 문화를 구축했으니 문무왕이야말로 ‘해상세력의 선각자’요, 또한 선견지명과 지략이 풍부한 ‘대전략가’로서 재조명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곧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