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길 박사(한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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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년 전 창림사지를 조사할 때 논 두렁에 흩어져 있는 탑신부중 하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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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명필가 김생의 비문 쌍거북, 비는 경주박물관에 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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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림사 대웅전 또는 건물기둥 받침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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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림사를 방화 파기 하고 석가모니 염주를 약탈해 기증했다는 문헌 | ||
우리나라 문화재가 가장 많이 묻힌 곳이 신라의 도읍지 경주이다. 임진왜란 전쟁시 왜군들이 많이 약탈해간 곳도 경주이다.
1592년 4월1일 제2진으로 경주로 진격해 온 부대는 구마모도(熊本)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다. 그는 2만2천명 병사를 데리고 경남 언양을 거처 4월20일 경주에 진격했다.
구마모도는 곰의 고향이다. 가야의 후예들이 일본에 들어가 일본 고대 국가를 세울 때 곰의 유래를 따 지은 지명의 하나다.
구마모도란 명칭은 규수지방에 많이 있다. 학자들이 지은 '제2의 가야국이 일본이다', 또는 '일본 역사의 고향은 조선이다' 등 많은 관련 서적들도 나와 있다.
임진 전쟁이 일어날때 준비를 갖추지 못한 조정은 당파 싸움에만 몰두하였다. 경주는 부윤마저 공석 중이었고, 경주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대항했으나 실패하고 경주 일대는 일본 왜장들 손에 들어갔다.
왜군은 경주 일대를 장악하고, 안내한 덕오랑(德五郞)을 앞세워 경주 불국사를 비롯해 사찰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가토는 부하를 시켜 방화 전에 "보물을 먼저 살피고 쓸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너라"고 당부했다.
경주시 배동 산6-1에 가면 창림사지(昌林寺地)가 있다. 천년사찰 중에 가장 오래된 절 중 하나다. 통일신라 문성왕 844년에 세운 절이다. 세계적인 사찰이었다. 중국 사신들이 들어올 때 숙소로 정하고 외교관을 접대했던 곳이다. 창림사는 1592년 4월22일 파괴되어 420여년이 되어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 김문길 교수는 1975년 제1기 선발대로 일본 유학을 할 때 신라사를 연구한 교수들이 가장 흥미있게 조사하고 싶어했던 곳이 창림사지였다.
지금도 일본 연구자들은 창림사를 '南林寺(남림사)'로 알고 있다. 혹은 남산사지로도 통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 보물의 도시(경주)의 남산이란 곳 산기슭에 신라의 유명한 사찰인 남림사가 있다"고 연구한다. "남림사는 곧 창림사이다"라고 필자는 발표한 적이 있다. 그 후 수 차 방문조사를 했다.
조사 때 석탑들이 무너져 논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원래 창림사에 석탑이 몇 개 세워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석탑의 탑신부(塔身部)가 논과 도랑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남아 있는 3층석탑 바로 옆에 무덤이 한 쌍 있었다. 이웃 사람에게 문의하니 그 무덤은 "이 지역의 유명한 분의 무덤"이라고 했다. 지금은 개발지역으로 정해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으니 석탑 탑신부의 돌이 그냥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석탑 하나만 보수하여 그대로 세워져 있다.
창림사지에서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신라 명필 문인 김생(金生)의 쌍거북 비문이다. 비문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지만 쌍거북은 방치되어 있었다. 일본 연구자들은 "쌍거북은 세계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문화재이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뿐인가. 일본 연구자가 소지한 기록문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寄)'에는 창림사지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석가의 염주'를 꼽는다. 창림사는 세계적인 명승 사찰이라 석가의 염주를 신라시대 창림사 주지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당시 석가는 보리수나무 열매(辱檀珠)로 16개의 염주를 소유하고 있다가 한 개를 창림사에 기증한 것이다.
석가의 염주는 가토가 가지고 가서 니가타현(新潟縣)에 있는 사찰 창복선사(昌福禪寺)에 기증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니가다현에 안내를 하는 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창복선사를 가보니 "한국 정부 고관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라 하면서 "특별히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깊은 보물창고에 있는 것이라 처음 보여주는 것이라 하고, 꺼내는 것도 정숙한 여성이 기도를 하고 나서야 꺼내 보여주었다.
석가의 염주는 1m 정도의 크기로 꽤나 길었다. 색깔은 아이보리 색이고, 그들은 보관이 잘되어 있다고 하면서 인도의 어느 사찰의 염주보다도 상태가 양호하다고 자랑했다.
임진전쟁 당시 가토군은 "조선 사찰 곳곳마다 보물이 있으니 먼저 꺼내고 방화하라"고 명령한 것이 실감이 갔다.
필자는 '임진 전쟁은 문화전쟁이다'를 저술할 때 우리나라 문화재 8만여점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왜군은 전쟁 시 시골 초가도 뒤집어 숟가락 하나라도 더 가지고 갔다는 문헌도 있다. 또 깨어진 개 밥그릇도 가지고 가서 오늘날 보물로 자랑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왜장 가토는 전쟁 때 가지고 간 조선 문화재로 보물관으로 만들어 '조선보물관'이라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필자가 그때 조사하여 쓴 책은 실감이 났고, 당시 문화체육부가 선정도서로 해 산교육의 자료로서 수만권이 팔렸다.
지금 창림사지는 개발지로 선정되었으니 앞으로 어떤 목적으로 개발할지? 우리 선조의 얼과 혼이 담겨있는 사찰이니 복원이 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사를 해야 하고, 특히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조사하여 도록(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우리의 혼과 얼을 찾고 있는 교수로서 정부 문화재 관리부서에 당부할 것은 경주시 배동에 있는 창림사지를 다른 목적으로 개발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창림사를 잘 복원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복원 시에는 논두렁에 흩어져 있는 석탑을 모아 복원하고, 세계에 둘도 없다는 신라 명필 김생의 쌍거북 비문을 현장에 다시 세우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