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이전 견해 오해한 보기…정답이 오히려 오답” 비판
“생각하는 나”와 “영혼”의 혼용 전제…논리 성립 안 돼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철학 개념, 출제 부적절” 지적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 17번 문항.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 17번 문항.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 17번 문항에 대해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자의 지적이 나왔다. 문제 지문에 등장한 철학 개념의 고난도와 함께, 정답으로 제시된 보기의 논리적 전제가 오류라는 주장이다.

이충형 포항공대(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는 19일 수험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칸트 철학이 등장한 수능 국어 문제를 풀어봤는데, 17번 문항에는 답이 없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철학자 연감이 선정한 ‘2022년 세계 최고 철학 논문 10편’에 오른 바 있다.

해당 문항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인격 동일성 개념을 다룬 지문을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 ‘갑’과 ‘을’의 대화를 읽고 갑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한 반응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다. 

갑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스캔해 프로그램으로 재현해도 본래의 자신과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평가원은 여기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3번 보기를 제시했다.

3번 보기는 “칸트 이전까지 유력했던 견해에 의하면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인격의 동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갑의 입장은 옳지 않겠군”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보기가 오히려 틀렸다고 본다. 그는 “지문에 따르면 칸트 이전 견해는 ‘생각하는 나’(즉, 영혼)가 단일한 주관으로 시간 속에 지속될 때 인격 동일성이 성립한다고 본다”며 “하지만 갑은 프로그램 재현체에는 단일한 주관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의 지속만으로는 인격 동일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오히려 칸트적 관점에 가까워 옳은 말”이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특히 보기 3번이 철학적으로 성립하려면 “‘생각하는 나’와 ‘영혼’이 같은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이는 지문에도, 보기에도 명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a=b이고, a가 C면 b도 C다’는 식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실제 철학 개념에서는 이런 단순한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며 “고등학생 수준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고난도 철학 개념을 평가원이 무리하게 문제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해당 지문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지속성, 자기의식, 실재성 같은 개념은 철학 전공자도 어려운 개념”이라며 “이 문제는 단순히 정답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수능의 난이도와 출제 적정성 자체를 다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해황 독해·논리 강사도 유튜브 채널에서 이 교수와 같은 분석을 내놓으며 “면밀히 따져봤을 때 평가원 정답은 논리적 비약이 있으며, 수능 출제 문항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동의했다.

현재 해당 문항에 대한 이의 신청은 아직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으나, 수험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철학 시험이냐”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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