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태 공학박사·기업경영연구원장
“2주 간격으로 타는 기차…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여행의 길동무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 과거는 살아있다. 괴로웠지만 슬프진 않다. 모든 것은 그 날 7월의 축제일에 시작되었다.”로 시작되는 감미로운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하는 추억의 영화. ‘부베의 연인’이다. 영화는 14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약혼자 ‘부베’를 찾아가는 ‘마라’라는 여인의 순애보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세계 2차 대전 후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시련을 겪는 여인의 이야기가 그 줄거리다.

잊을 수 없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흑백의 영상으로 펼쳐지는 이탈리아 전후(戰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영화 속 줄거리에 대한 내용 대신 영화를 보며 비록 흑백의 영상이지만 1963년의 거리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담기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풍경과 거리, 시간과 공간이 차단된 세상을 만났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지고 여행 자유화로 동서양 어디든지 안가는 곳이 없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나 그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사는 사람 모습만 좀 다를 뿐. 그런데, 영화 속의 이탈리아 소도시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인류가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난 것이 행운일까? 불행일까?

우리 인류는 전 세계 컴퓨터를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 정보를 주고받는 글로벌 통신망을 만들었다. 사람과 기기가 연결되는 연결망과 데이터가 오가는 세계적 연결 구조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유행하면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그 유행을 빠르게 만난다. 극강의 개방성과 동질감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K-팝 댄스를 세계 곳곳의 유명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라니까 아직까지도 실감나지 않는다. 너무 빠르고 짧게 최신 유행이 확산되고,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는 세계인이 공유하며 즐기는 세상이 왜 이렇게 못마땅할까?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처음 일본에서 다시마의 깊은 국물 맛이 글루탐산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감칠 맛’이라는 제 5의 맛을 발견했다. 이 후 글루탐산나트륨(MSG)를 결정화 하여 식용조미료로 만들었고, 세계는 그 맛에 환호하며 어디를 가나 MSG를 가미한 음식이 세상에 널리 보급되었다. 문제는 세계 어디를 가나 MSG로 인해 음식의 맛이 동일한 것이다. 미국이나 이탈리아나 프랑스, 일본, 한국이나 입에 익숙한 그 맛으로 인해 각 나라 특유의 고유한 맛이 MSG가 대신하고 동질화 된 것이 너무 아쉽다. 마치 그것처럼 말이다.

신비감도 없어지고 지역적 특성과 특징도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흑백화면에 등장하는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저 이탈리아 시골 풍경과 생활상이 전해지는 방법이 당시에는 느렸다. 전달하는 매개체가 없으니 간혹 영화 속에서 만난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 곳을 가려면 비행기가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한다. 너무나 빠르게 정보가 공유되고 전달되는 세상의 이기(利器) 덕분에 세상 모두가 같은 음식, 가구, 거리, 풍경, 문화를 갖게 되었다.

영화 속 그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한 줄기 소중한 흑백영화 속의 풍경으로 남아 나의 아쉬움을 달래 줄 뿐이다. 비가 내리듯 불안정하고 낮은 화질의 화면이 오히려 고맙고 정겹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보루인 영상 속의 옛 추억과 세상 곳곳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또 다시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 집의 오래되고 낡은 모니터로는 재생조차 되지 않는 4K, 8K 고화질의 영상을 제공하는 기기로 만든 가짜 영상이 또한 그것이다. 지난 해 12월에 출시된 텍스트를 비디오로 생성해주는 모델, 소리(Sora)의 탄생이다.

사용자들이 AI로 만든 짧은 비디오 컨텐츠를 여러 장면으로 이어 붙이기 방식으로 영상구성이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는 ‘눈 내리는 겨울바다’라고 입력하면 해당 내용에 맞는 장면을 영상으로 만들어주고,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감정 표현마저 구현하여 복잡한 영상도 제작이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 대신 컴퓨터 키보드의 명령으로 원하는 영상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니 마치 가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나의 이런 마음은 편협한 것 일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정보화, 세계화, 고도의 문명화의 터전에서 살아가겠지만, 웬지 자꾸 미안한 마음이다. 우리 세대가 이룩한 인터넷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이 오히려 각 나라마다 자신의 특색과 아름다운 정서를 발전시키는 터전을 지우는 기반이 되게 한 것은 아닌지... 다소 폐쇄적일 수는 있지만, 정보가 늦어 오히려 더 자신의 특색을 더 강화하는 세상을 망가뜨린 건 아닌지 염려된다. 1963년, 그 언제 적일 것인지도 모를 오래된 낡은 화면에서 이탈리아 시골의 거리와 소품을 보며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면을 바꾸니 너무나 밝고 선명한 총천연색의 영상이 지나간다. 깨끗하고 밝고 화려하지만 어둡고 잘 알아 볼 수도 없는 수십 년 된 영상이 더 좋은 것은 나만의 아집일까? 애절하게 들려오는 ‘부베의 연인’의 서정적이고 애절한 음악이 내 귓가를 지나며 나의 이런 감정의 깊이를 더 하고 있다.

정상태 공학박사·기업경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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