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가 내방가사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며 다시 한 번 한국 기록문화의 중심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안방에서 써 내려간 ‘내방가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 등재를 위한 국내 대표 후보로 최종 선정됐다. 2022년 유네스코 아·태 지역 목록 등재에 이어 이번에는 더 높은 세계 기준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기록은 시대의 얼굴이다. 그리고 이번 후보 선정은 한국 여성 기록문화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의미 있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번 등재 신청에는 총 567점의 기록물이 제출됐다. 그 중심에는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있다. 영남 북부 지역에서 성장한 내방가사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국학진흥원은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 보존을 책임지는 핵심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국학진흥원이 관리 중인 292점, 국립한글박물관의 226점, 그리고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던 49점이 합쳐져 하나의 기록유산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특히 의미가 크다. 국가와 지역, 기관이 힘을 모아 만든 문화연대의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안동시는 이미 기록유산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왔다. 2015년 ‘유교책판’, 2016년 ‘한국의 편액’,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 그리고 2022년 아·태 목록에 등재된 ‘내방가사’까지 꾸준히 성과를 쌓으며 국제적 기록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번 세계기록유산 도전은 그 연속선상에서 지역이 가진 기록문화 자원을 세계 무대에 펼쳐 보이는 중요한 단계다.
내방가사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한국국학진흥원은 ‘유교책판’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한국의 편액’ ‘만인의 청원, 만인소’와 함께 총 5종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소장한 기관이 된다. 더 나아가 국학진흥원은 국제자문기구(IAC)와 함께 운영하는 ‘한국세계기록유산 지식센터’를 활발히 가동하며, 단순한 기록물 소장에 그치지 않고 세계기록유산의 보존과 활용, 인식 제고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명실상부한 국제적 기록유산 허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내방가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스스로의 언어로 현실과 감정을 적어낸 대표적 기록유산이다. 당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은 ‘내방’이라는 물리적·사회적 제약에 묶여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그들은 배움을 갈망했고 글쓰기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려 했다. 한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여성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었고, 이는 자아 표현이자 시대에 대한 응답이었다. 내방가사는 바로 그 흔적이다.
특히 내방가사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 사회가 가장 큰 격변을 겪던 시기에 활발히 창작됐다. 조선 후기의 질곡, 제국주의 침탈과 국권 상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까지.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교육과 사회 참여에서 배제됐지만, 매일의 삶과 격변하는 세상을 가사로 쓰고 서로 필사해 읽었다. 전체 내방가사의 약 80%가 이 시기에 집중된 것은 여성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기록 활동을 이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문학적 특징 또한 주목할 만하다. 내방가사는 가사 형태를 취하지만 내용은 매우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다. 계녀가, 이별가, 위로가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며, 가족·자식·결혼·이별 같은 여성의 삶이 중심이다. 특히 시대의 변화를 여성의 시선에서 문학화한 작품들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도 여성들이 사회적 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일부 작품은 딸의 죽음과 같은 깊은 비극, 전쟁으로 인한 상실,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감을 섬세하게 그리기도 했다.
전승 방식도 독특한데, 낭독과 필사 문화가 강했고 지역별 여성 공동체 단위에서 창작과 전달이 이루어졌다. 필사본이 중심이기 때문에 원본 보존이 쉽지 않지만, 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내방가사는 놀라운 밀도로 전승됐고, 오늘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내방가사는 여성 문화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기록유산이다.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삶을 기록한 드문 사례이며, 한글이 생활문자를 넘어 사적·사회적 소통의 수단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립한글박물관 등에서 내방가사 전시도 활발히 이루어지며 대중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내방가사는 여성의 일상과 사회 인식을 담아낸 소중한 기록이자 지역 문화의 자긍심을 대표하는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내방가사는 보존해야 할 옛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뚜렷한 메시지를 던진다. 여성의 목소리가 세계 문화유산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 기록이 지역을 살리고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2027년 프랑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최종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보존·연구·활용 전략을 체계화하고, 내방가사의 현대적 가치가 퇴색되지 않도록 균형 있게 전통성을 이어가는 일이다. 무대화나 공연 등 새로운 시도는 필요하되, 원작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접근이 요구된다.
안동시의 이번 노력은 여성 기록문화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다. 여성들이 집 안에서 시작한 작은 목소리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닿았듯, 세계 기록유산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길 기대한다. 내방가사는 이제 지역의 자긍심을 넘어 세계의 유산으로, 역사와 삶을 잇는 문화의 다리가 될 것이다.
